[도서리뷰] 밝은 밤 - 최은영

nya-ong 2021. 9. 21.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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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북클럽 8월 책인 ‘영혼의 집’ 라이브 방송에서 김영하 작가가 독자들에게 묻는다.
여러분은 여러분들의 가족사를 의식적으로 파고 들어가본 적이 있느냐고,
할머니는 어떤 분이셨는지, 할머니의 할머니는 어땠는지 작심하고 파 본적이 있느냐고.

‘밝은 밤’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영혼의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와 ‘나’가 약 이십여년만에 희령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우연히 만나고
증조할머니부터, 할머니, 엄마, 그리고 독자에게는 ‘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밝은 밤’은 여성을 주축으로 하여 등장인물들은 각자 살아온 시대의 여성들을 상징한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은 여성을 상징하는 증조할머니 삼천이와 새비
한국전쟁 이후 교육보다는 돈을 벌고 가정을 꾸렸던 대부분의 여성을 상징하는 할머니 영옥과
이와 반대로 그 어려운 시절 대학에 진학하여 ‘신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희자.
그리고 오늘 날 우리네 엄마의 모습을 한 엄마 미선, 오늘 날의 딸들을 대표하는 ‘나’ 지연.

남편은 하늘, 아내는 땅이라는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그 어떤 권리 없이 의무만 행해야 했던 여성들.
그리고 그 여성들간의 연대를 보여준 삼천과 새비아줌마의 이야기는 슬프고도 강렬했다.

‘나’의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는 현재를 살아가는 독자가 보기엔 거의 쓰레기급이지만 그 시절의 ‘당연함’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 가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은 남편에게 있었고 그 책임감은 이런 것임을, 몸소 보여준 새비아저씨도 있다.

최근에 읽은 책들이 성평등, 여성이야기, 가족, 이런 분야라 그런지 ‘나’의 이야기가 나올 땐
‘정상가족’이 무엇인지, ‘여성’의 역할은 어때야 하는 것인지, 우리사회 성인지 감수성 부족을 절실히 느꼈다.

소설 속 인물들과 대사와 상황의 디테일은 현실고증을 제대로 보여주었고 나와 내 주변에서 충분히 겪고 있는 일들이었다.
‘내개 무해한 사람’에서도 느꼈지만 최은영 작가는 사람의 심리, 감정상태를 표현하는데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다.
공감능력이 엄청 뛰어난 사람일 것 같다.

소설은 제목과 달리 밝은 내용만은 아니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특히 여성들에게는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나’와 엄마의, 엄마와 할머니의 화해를 암시하고 할머니와 희자의 재회로 마무리되면서
‘나’는 엄마와의 화해 뿐 아니라 스스로를 채찍질 했던 자기 자신과의 화해도 시도한다.
나 자신과의 화해는 독자들에게 특히 더 와닿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의 감정, 내가 내린 결정에 주인은 내가 되어야 하고 그래야 결과에 대한 책임에도 당당해질 수 있다.
김구 선생님이 그랬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하고, 나를 다스려야 뜻을 이루고, 그러므로 모든것은 내 자신에 달려있다고.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p.14


나는 누구에게 거짓말을 했나.
나에게, 내 인생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알고 싶지 않아서, 느끼고 싶지 않아서.
어둠은 거기에 있었다. p.299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내게서 버려진 내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도.
그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나를 함부로 대하는 배우자를 용인했던 나와
그런 나를 용서할 수 없어 스스로를 공격하기 바빴던 나에게도 다가가서 귀를 기울인다.
나야. 듣고 있어.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해줘.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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